난다주

Julia Marsh: 과거에 당신의 작품은 반복을 통해 지워진 자신을 발견하는 과정이었다. 최근의 작품들은 인간, 혹은 자신에 대한 언급을 삼가는 한편, 좀 더 소비자 사회의 특성에 대한 지향을 담은 소재를 다루고 있다. 어떻게 이러한 최근작에 도달하게 되었는지 설명해 줄 수 있는가?

난다주: <모던 걸> 작업에서는 반복과 복제를 표현 방법으로 근대성 안에서 익명화, 획일화 된 스스로를 자조의 어조로 확인하고자 했다. 검은 옷과 선글라스의 착용도(과거의 인쇄 매체에서 인물의 눈을 검은 선으로 가려 얼굴을 지우는 것과 같이) 마치 그림 문자가 표현하는 인간으로 읽혀지길 원했던 장치였다. 하지만 그런 설정은 의도했던 방향과는 반대로 작가의 개성으로 해석되어 이미지 안에서 역할을 행하는 인물을 작가와 동일시하는 시각을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하나의 개성으로 고정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나의 사적인 측면을 드러내고 싶지도 않았다. 또, 나의 몸으로는 다양한 배역을 표현하는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다른 표현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익명이 강화되고 캐릭터가 고정된 가면을 사용했다. 결과적으로 관람자들이 작업을 바라볼 때, 이미지 안의 인물이 작가 자신인지, 고용된 모델인지, 그 인물의 가면 속 진짜 얼굴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관심보다는 작품이 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에 집중하게 된 것 같다.

내 작업의 내용적 측면에서 소비는 중요한 요소이다. 구체적으로는 근대성과 서구화에서 비롯된 소비에 대해 다루고 있다는 것이 정확할 듯하다. 알다시피 한국의 서구화는 자연스럽게 주변국과의 접촉을 통해 일정한 시간을 두고 생성되었다기보다는 일찍이 서구의 문명을 받아들인 일본에 의한 강제통치와 함께 갑작스럽게 이루어졌다. 정치적으로 식민지 시대는 마감되었지만 서구로부터의 제도, 기술, 사상, 문화 등의 유입은 현재까지 비슷한 속도와 양으로 진행되고 있다. <모던 걸> 연작이 서구 문화의 유입 초기부터 지금까지의 특징을 전반적으로 다루었다면, <The Day>작업들은 서구로부터 소개된 기념일 문화가 한국에 들어와 토착화되면서 변형된 형태로 나타나는 기이한 소비의 형식에 집중했다. 기념일 문화는 물질적인 소비뿐만 아니라 각종 이념을 동반하는 시간의 소비를 함께 요구한다. 특히 근래 한국의 기념일 문화는 결핍의 해소를 기억의 환기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소망에서 활성화되고 있는 것 같다.

JM: 지난 번에 만났을 때 사진기술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당신의 작업이 상당히 영화적으로 보이는 것 또한 명백하다. 영화와 사진이라는 두 매체의 역사가 뒤얽혀 있듯이, 당신의 작업에서도 그들은 불가분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전통들과 기술들이 어떤 측면에서 당신의 작업에 영향을 미쳤는가?

난다주: 나의 작업이 영화적으로 보이는 가장 두드러진 이유는, 내 작업이 이야기를 가지고 있고 여러 시간의 기록들이 압축된 이미지이기 때문일 것이다. 당신의 말처럼, 나는 작업을 계획하고 과정을 진행할 때, 사진과 영화를 비롯한 시각매체의 특성들에서 실마리를 얻거나 의도적으로 작업에 끌어들이기도 한다. 나는 사진매체로 작업을 하는 사람으로, 특히 시각매체들이 의도하는 ‘사실성’과 ‘구경거리spectacle’가 근대 이후 사회와 사람들에게 끼치는 영향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 프로파간다, 이미지로 대체되는 소유욕, 일상의 노출을 통한 자아상 만들기, 감시와 고발, 구경하기와 구경거리 되기 등 시각매체로부터 발생하는 모든 현상이 내 작업에 중요한 소재이며 질문이며 형식이 된다.

JM: 당신은 작업과정에 열정적으로 몰두하는 것으로 알고 있고, 특히 최근의 작업 결과물들은 조형적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겠다. 당신이 어떤 종류의 사진을 찍을 지, 그리고 어떻게 당신의 작업에서 발생하거나 나타난 오브제/이미지들을 구성할 지를 결정할 때, 이미지를 만드는 현상학에 대한 당신의 지식이 그 결정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궁금하다.

난다주:  ‘이미지를 만드는 현상학에 대한 지식’의 의미를 잘 모르겠다. 작업의 내용과 형식을 결정하는 과정과 방법에 대한 서술이 이 질문의 답이 되길 바란다.

한 작가의 작업이 통일된 형식을 가지기도 하지만 나는 작업의 내용에 따라 가장 적절한 형식이 무엇인지를 고민한다. 사진은 대상을 이미지로 만드는 작업이며, 그런 면에서 사진은 일종의 수집이다. 나의 작업은 수집된 이미지를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주제에 대한 나의 생각을 표현하기 위한 질료로 수집한 대상을 재구성한다. 초기의 작업이 행위의 기록들을 여러 장 촬영하여 재조합하는 형식이었다면 최근의 작업은 사물들과 인간을 구성하여 하나의 조형물로 만들어 촬영했다. 외형적으로 형식과 작업 과정에 많은 변화가 느껴지겠지만 완성된 이미지가 이미지의 조합이냐, 사물의 구성이냐의 차이일 뿐 대상이 누군가에 의해 배치된 우연의 기록이 아닌 의도적인 ‘떼기’와 ‘붙이기’로 만들어진 작업이라는 점에선 같은 맥락을 유지한다. <모던 걸> 연작에서는 동질성와 시간의 중첩을 표현하기 위한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이미지 조합을 선택했고, <The Day> 작업에서는 기념일의 연극적 행위를 강조하기 위해 무대의 형식을 빌었다. 두 작업 간의 차이가 있다면 내가 <The Day> 작업 과정에서 보다 물질적인 체험을 원했다는 것이다. 기념일 작업을 통해 기념일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의식 행위를 모방할 뿐 아니라 그 행사를 위한 경제적 시간적 소비, 시장 방문과 고르기, 음식물의 냄새와 맛, 일회성 물질의 (사진처럼) 허무한 폐기까지도 경험할 수 있었다. 전시가 설치 과정의 기록물이나 조형물로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수행은 기념일 문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만들어진 이미지의 최종적인 공개를(전시를) 설치물이 아닌 사진으로 택한 이유는 시점과 크기, 색과 질감의 표현, 인물의 자세 등을 목적된 상태로 고정시켜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작업을 계획할 때에는 어떠한 형태로, 어느 정도의 크기로 얼마나 미세한 부분까지 표현되어야 할지를 기계의 성능, 제작 가능한 시스템을 고려하여 결정한다. 예를 들어 <The Day> 연작에서는 모든 사물의 세부를 스펙터클하게 보여주기 위해 완성된 설치물을 조각조각 나누어 촬영하고 촬영된 이미지를 이음새 없이 다시 조합하는 방법으로 완성했다. 그런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결과물은 눈이 인식하는 거리감과 시점에 미세한 혼란을 일으켜 주술의식에 참여하고 있는 것처럼 현기증을 일으키게 하는 것을 의도하기도 했다.

JM: 당신의 작품들 중 특히 ‘모던 걸’연작은 소비자 문화와 그것이 여성상에 끼치는 영향에 대한 자각을 반영한다. 어떤 면에서 당신의 대상화하는 방식은 여성주의적 시각과는 다른 관점에서 개인의 자유에 대한 제한들에 대해 비판을 가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 좀 더 설명해 줄 수 있는가?

난다주: 근대성과 근대인에 관한 작업의 대상을 특별히 ‘모던 피플’이나 ‘모던 보이’가 아닌 ‘모던 걸’이라는 여성으로 선택한 이유는 ‘제국’을 남성에, ‘피식민성’, ‘모방하는 자’의 위치를 ‘여성’에 비유하려는 의도일 뿐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보고자 한 것은 아니다.

내 작업에서 ‘모던 걸’은 다중의 의미를 가진다. 일반적으로 ‘모던 걸’은 서구의 도회적 문명이 가져 온 새로운 생활 방식을 받아들인 (특히 극동아시아의) 여성 일반을 지칭한다. 그들은 전통사회에서 부여된 역할보다는 서구화와 더불어 유입된 자아실현이라는 개념을 수용하여 저마다의 개성 발현에 열중했으며, 서구의 신여성(New Woman)을 모델삼아 그것을 모방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위치를 옮기려 했다. 유행(‘여우털 군단’, ‘장신운동’), 취향(‘콩다방’), 이념의 선택(‘냄비’), 자본(‘녹색이 좋아’, ‘촬리씨의 호객행위’) 등의 근대성은 현대에도 그대로 적용, 유전되고 있다. 다른 점이라고 한다면 20세기 초반의 사람들은 전통사회에서의 주어진 삶과 서구의 근대적 삶을 놓고 갈등했던 세대라면 현대인은 빠르고 거센 변화의 흐름 속에서 계속 새로운 것을 선택해야만 적응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모던 걸’연작에 등장하는 인물은 근대의 ‘모던 걸’인 동시에 현대인이며 현대사회의 구성원인 나의 모습이 중첩되어 있다.

JM: 당신의 0303’과 0505’연작은 한국의 문화에 대한 깊은 불만족감을 보여준다. 두 연작 모두 몹시 양식적이며, 상징적 층위를 지닌다. 일종의 비평으로 보이게끔 의도한 것인가?

난다주: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비평적 시각은 소비 사회 안에서 인간이 생산과 소비를 위한 천박하고 어리석은 소모품으로 존재한다는 자각보다 인간이 생존과 번식을 위해 형성한 질서와 제도가 폭력적이고 이기적이며 탐욕스러우며, 내가 그 안에 속해있고 나 또한 그런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불편한 감정에서 비롯된다. 나는 <The Day> 연작에서 기념일을 비롯한 모든 의식과 행사들이 인간 스스로 만든 질서와 제도 안에서 욕망을 최대한 표현할 수 있는 기회의 무대이며 전이된 형식으로 나타난 것일 뿐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JM: 당신의 감추어진 신분, 좀 더 정확하게는 대중에 공개된 페르소나에 대해 말해 줄 수 있는가? 그리고 작품에서 그 자아를 어떻게 위치시키는가?

난다주: ‘인식’과 ‘의미’는 내 작업의 가장 본질적인 질문이다. ‘이름짓기’는 의미를 규정하는 행위로 제도, 지식의 권위, 여론 등은 이름 짓는 자, 구분하는 자, 개념을 정리하는 자의 위치에 있으며 그 대상은 사물이나 사람 뿐 아니라 시간, 개념 같은 추상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인식하는 모든 것에 적용된다. 지금까지의 작업은 명명되어지고 구분되어지고 어떤 개념으로 정리되고 형식화 되어진 대상의 입장에서 스스로에게 부과된 ‘이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결과물들이다.

이름과 얼굴이 존재를 식별하고 증명하는 기능을 한다고 볼 때, 본명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수동적인 일정 역할을 부정함과 동시에 능동적으로 스스로를 규정하고자 하는 자기애적 행동이다. 본명이 도대체 뭔가? 왜 사람들은 그것을 그의 본질인 것처럼 굳이 밝히려 하는가? 우리는 모두 이름 없이 태어났다. 이름은 사회가 식별을 위해 달아 놓은 표식이며 혈족의 낙인이다. 나는 신분을 증명할 수 없는 이름을 사용함으로써, ‘익명’, 또는 ‘가면’ 뒤에 숨어있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드러낸다. 그리고 언제든지 다른 이름(다른 정체성)으로 도주가 가능한 유동적 상태이길 원한다.

나는 모든 작업 과정을 스스로 해결하려고 노력하며 작업이 온전히 나의 것이기를 원한다. 작업 안에서 스스로 피사체가 되는 것도 그런 의도에서 비롯된다. 또, 표현하고자 하는 역할을 가장 잘 수행할 수 있는 것은 연출가 자신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작업을 통한 비평의 불편한 자리에서 나 자신만 제거되어 빠져나오길 원치 않기 때문이다. 다른 누군가를 직접적인 대상으로 삼고 싶지 않은 것이다. 작품 안에 위치하는 대상은 문제를 제기하는 나이며, 그것을 바라보는 너이며, 전혀 다른 누구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이미지 안의 대상을 ‘나’라고 하기보다는 ‘난다’, ‘저 사람’이라고 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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