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민승

Julia Marsh: 처음 출발이 예술가가 아닌 걸로 알고 있다. 어떤 과정을 거쳐, 혹은 왜 예술가로 변모하게 된 것인가?

 장민승: 10대때 부터 지나치게 록음악에 심취해 있었고 당시에 처음 결성한 록밴드에 멤버로 지금 함께 협업을 하고 있는 정재일을 기타리스트로 만났다. 당시의 우리 음악은 서양의 헤비메탈등의 록음악을 모방하는 커버 록밴드였다. 이후 정재일은 천재성을 인정받아 정규교육을 떼려치우고 프로뮤지션의 길로, 나는 미대에 진학하게 되었다. 진학 후 학교에서 별다른 신선함을 받을 수 없었다. 97년도였는데 홍대앞에는 지금보다 더 많은 뮤지션들과 다양한 분야의 아티스트들의 교류가 넘쳐났다. 그 시절 나는 인디록밴드의 베이시스트로 약 1년간 전국의 각종 페스티발과 행사를 다녔고 간간히 정재일과 영화음악에 참여했다. 이후 98년 처음 간 런던여행에서 전자음악에 크게 심취하게 되었고 그 영향으로 심지어 홍대앞에서 클럽을 잠시 운영하기도 했었다. 이런 경험으로 서브컬쳐들을 온몸으로 세례 받으며 20대를 통과했다. 99년 군대를 가게 되었고 제대 후 스물 세살에 친분이 있던 음악분야의 대선배들과 영화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프로덕션을 설립했다. 당시는 한국영화의 황금기였기때문에 짧은 기간에 약 20여편의 장편상업영화의 프로듀서, 코디네이터로 영화필드를 경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직업적으로 음악듣기와 상업적인 활동에서 받게되는 피로감이 몰려왔고 대안으로 전공과 유사한 가구만들기를 취미 삼아서 시작하게 되었다. 나는 대학교육과정에서 미니멀아트에 심취해 있었고이를 방탕으로 한 디자인의 가구들을 정식으로 발표하게 되었다. 돌이켜 보면 디자인과 제작을 병행하는 사람이 없다고 표현할 정도로 경쟁자가 없었기 때문에 디자이너로서 데뷔가 매우 순조로웠다. 당시만해도 가구제작자가 나의 천직이라고 여겨졌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음악과 관련된 일은 하지 않게 되었다. 나의 테이블은 꾀나 인기가 있었기에 나는 자연스럽게 타인의 공간을 엿볼 수 있게 되었고 스른즈음에서는 그 공간들에 놓인 사물이 지닌 여러 맥락들과 그 것들을 소유한 사람들의 문화적 취향들을 비교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간혼 사물에 대한 편견이 지나치게 생기는 내 자신이 역겨워지기도 했다. 그래서 나와 같은 직업적 활동의 배경이 없었던 사람들은 비교와 편견 없이 사물들을 바라보는 것이 가능할까? 궁금했다. 그래서 가구만드는 일을 중단하고 3년동안 주한대사관들의 집무실을 촬영하는 작업과 다양한 공간을 대형사진으로 기록하는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고 이 결과가 <A multi-culture> (2010 One and J. gallery)와 <수성십경 in between times>(2010 아트라운지 디방) 이다. 이 지점이 20대에 겪은 다양한 문화적 경험들을 바탕으로한 나의 조형언어를 처음으로 발표한 전환점이다. 

JM: 당신의 작업은 아주 명확한 한계를 설정하려는 경향을 가지는데, Willing+Dealing은 예외적으로 그렇지 않다. 그러한 이유가 무엇인가?

 장민승: 정확히 지적한 것 같다. 나는 지나치게 형식미와 그것에서 오는 쾌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편이다. 내러티브가 물론 중요하지만 단 한장의 이미지나 음악 혹은 그것들이 지닌 형식미와 텍스츄어(디자인에서는 피니쉬)가 때론 내러티브를 능가하는 메세지를 준다고 믿어왔다. 그것들은 어찌모면 내가 어려서 부터 각분야의 메인필드를 직접 경험해 보고 거기서 보았던 테크닉과 협업방식을 습득해왔다고 본다. (‘상림’ 같은 경우는 이때의 경험이 없었으면 절대 불가능한 작업이었을것이란 생각이 나중에 들었다.)   비평가들은 나의 작업에 대해서 말하기를 가구를 만들던 사진을 찍던 뉴미디어를 다루는 작업을 하던 비교적 공통적으로 들어나게 되는 형미식를 발견하게 된다고 한다. 나의 작업과정들은 대부분이 과잉으로 시작했다가 최소한의 것들만 남기기 되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이로 인하여 보는이가 더 많은 이야기를 발견하기를 바랬다. 일본 문학장르 중에 하이쿠(haiku)라는 매우 간결한 정형시가 있는데 그 간결함과 암시성 때문에 보는이 마다 저마다의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게 된다. 즉 작업을 내 놓을때 마다 의견은 있지만 발언은 되도록 하지 않으려 했다. 혹은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스스로 형식의 틀에서 갖혀 있은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윌링앤딜링의 전시의 경우 전과는 달리 매우 유연하게… 그리고 별도로 전시를 위한 추가적인 생산을 하지 않고 내게 남겨진 발표되지 못한 잉여들(사진, 가구, 조각등등)을 편하게 벌려놓고, 조합해서 혼종적인 내 모습(작업)을 거칠게 한번 들어내 보고자 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전시공간도 수직과 수평이 어긋나고 거친 곳을 선택했다. 특히 <가구팔자> 전시에서는 내가 10년 만에 발표한 TABLE 2도 함께 놓였는데 그 것이 나오기 까지의 일종의 리서치 작업의 결과인 <A Multi-Culture> , <수성십경 In between Times> 의 B-cut들이 함께 전시되었고 이 전시를 통해 내가 사물을 보는 방법이 전과는 매우 달라져 있음을 느낄수 있었다. 그동안의 나의 작업이 큰 깨우침을 준 것을 그 전시를 통해 느꼈기에 일종의 지난 10년의 결산 회고전 처럼 느껴졌다.

JM: 당신은 사진 작업 외에도 장재일과의 협업을 통해 여러 사운드 작업 또한 진행해왔다. 이러한 종류의 미디어 작업은 최근 부쩍 지원을 받고 있고 여러 전시장에도 얼굴을 내밀고 있다. 예를 들어 상림과 같은 프로젝트를 구현하는데 직면했던 어려움이 있다면 어떤 게 있는가?

 장민승: ‘상림’을 진행하면서 가장 크게 직면하고 어려웠던 문제는 이작업의 형식을 바라보는 인식의 문제였다. 상림은 공공미술이 갖고 있는 일률적인 형식과 그것을 구축하는 관행의 문제점을 극복해 보고자 중앙기관관 지방기관이 전문가와 함께 힘을 모아 보자는 취지로 시작된 시범사업이였다. 그리고 우리의 대상지인 경남 함양의 상림공원(상림숲)은 지명에서 알수 있듯이 공원인 동시에 숲이기도 하고 천연기념물인 동시에 근린생활공원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미 많은 것을 가져다 놓아 경관을 훼손한 이 지역에 아무것도 놓지 않고, 보이지도 않고 그리고 공공미술을 제안할 때 가장 중요한 요소인 내구성(영구성)도 없는 시간이 지나면 사라져 버리는 공공미술 작업을 하자고 했을때 기존 방식과는 매우 달랐기 때문에 이 것을 설득해 나아가는 과정들이 초기에는 가장 어려웠던 지점이다.

JM: 상림과 문래, 그리고 제주도에서 작업한 세 개의 사운드 작품은 또한 장소특정적이라고도 불릴 법 하다. 당신은 장르 사이를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보는가? 아니면 모두 같은 것일 뿐인가?

 장민승: 장민승+정재일의 작업을 가끔 짧게 요약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사실 우리도 우리 작업을 무엇이라고 설명하기 힘들고 굳이 무엇무엇이라거나 장르라고 설명하지는 않지만 확실히 누구도 하지 않았던 결과를 보여주고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은 한다. 상림과 문래동 그리고 제주에서 했던 작업은 장소적 특성도 다르고 그 작업이 이뤄진 배경도 너무 다르며 때문에 이를 경험한 관객들도 다를 수 밖에 없게 되는데 자율적으로 작업한 작업들과 어떤 목적을 갖고 만들어진 커미션 작업들 사이에는 구별되는 지점이 있음을 최근에 느꼈다. 이 질문을 받고 연상하게 되는데 앞으로 계획되는 우리의 작업들은 전과는 구분되는 변화를 갖게 될 것이다. 따라서 장민승+정재일의 작업을 어떤 장르로 구분하기 보다는 그냥 우리의 작업으로 기대해 주었으면 좋겠다. 먼 훗날 우리의 작업이 하나의 스타일이 아닌 장르가 되었으면 좋겠다. 심지어 그것이 미술이라고 인식되지 않았으면 한다.

JM: 각각의 당신 작업들은 주택이라든지 건설현장같은, 일종의 사회적 관심사가 밑에 깔려 있다. 당신의 최근작인 Willing + Dealing도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가?

 장민승: 앞의 1.2. 질문의 대답과 겹치는 부분이 많을 듯 하다. 예술가를 비롯 모든 사람들이 살고 있는 환경(도시, 사회)에과 관계 맺고 있을 것인데 일반사람들과 달리 예술가들은 그것들을 적극적으로 별견하고 발언한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디자이너로서 이십대를 보내면서 발견한 나의 매우 서구화된 디자인 언어가 혼란스러웠고 그것을 해소하고자 하는 뜻에서 인류학자들이 필드워크를 나가듯 하는 뉴타운 지역을 비롯해 많은 현장을 카메라에 담았다. 처음에 이것들은 누구에게 보여주고자 시작한 것들은 아니였고 하다보니 프로젝트가 된것도 있었고 그렇지 못한 것들도 있었다. 어쩌면 프로젝트가되어 전시했던 작업들 보다. 윌링앤딜링에서 선보인 이미지들은 정제되지 않은 것들이였기 때문에 그렇게 보일수도 있었겠다. 참고로 <가구팔자>는 상업적인 용도의 가구를 만들면서 남은 목재스크랩들, 사진과 조각의 B-cut 그리고 전시장 주변에서 주워온 가구파편이나 이미지들을 즉흥적으로 배치한 것이다. 그 곳에 놓인 하나의 개별 설치들은 하나의 요소이며 전시장 자체가 하나의 큰 작업이였으면 했다.

JM: 당신은 상업적인 작업과 예술 창작 사이를 비교적 쉽게 오가는 것 처럼 보인다. 한국에서 미술과 상업의 관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장민승: 미술가로서 많은 돈을 벌어본 경험이 별로 없기 때문에 한국에서 미술과 상업의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은 사실 무리가 좀 있지만 내가 느끼기에 한국은 미술을 포함해 예술시장이 너무 작다고 생각된다. 이 것은 단지 예술품 거래가 규모가 작다는게 아니라 예술가가 예술분야와 상업적인 분야 구분하지 않고 용역비가 상대적으로 너무 작게 형성되어 있음을 말한다. 때문에 자연스럽게 예술가가 예술해서 먹고살기가 어려우니까 다른일을 해야되기 마련이라고 생각된다. 내 주변의 많은 뮤지션들 보면 대중음악 세션에서 부터 자신의 고유음악 활동까지 매우 다양하게 하는 것을 흔히 보게 된다. 이를 통해 자신의 작업습관을 잘 지켜내며 꾸준한 창작을 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 내가 만난 많은 미술가들은 이렇게 되면 소위 떼가 묻는다고 부끄러워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나의 경우 쉽게 오가는 것 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매우 어려운 문제이다. 나의 경우 호기심으로 시작한 음악이 생계가 되었던 시기가 있었고 생계가 되고나니 호기심이 디자인으로 옮겨갔다. 또 디자인이 생계가 되니 여기서 습득된 시각을 바탕으로 다소 늦게 미술을 하게되었다. 사실 지금은 미술작가가 직업이 되어 버렸고 그 일에 시간을 보내는게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이 많아 졌지만 다행인 것은 이 일은 전혀 나에게 생계가 되어주지 못한다. (특히 점점 비물질적이고 특정한 경험을 통해 소통하는 일시적인 작업에 매력을 느끼기에..) 때문에 이 일이 앞으로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된다. 만약 이 것이 주요 수입원이 된다면 나는 분명 지루함을 느낄 것이다. 나와 애증의 관계인 상업영화, 대중음악, 디자인 분야는 미술보다는 훨씬 큰 자본과 신기술 그리고 훈련된 이성적인 사람들이 모인다. 나는 이 곳으로 부터 단순히 돈만 버는 것이 아닌 소재의 발견을 비롯해 누구나 가르쳐 주지 않는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 서면으로는 질문을 방향을 잘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도 있습니다. 분량이나 적절한 대답이 아니라면 답변을 바탕으로 적절하게 재구성하셔도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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